[신앙단상] 81. 청소를 하다 말고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부장)
배봉한 요한 세례자(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부장)

해마다 봄 햇볕이 따스해지면 사무실 유리창을 닦습니다.

“그리움을 밀면 한 장의 먼지 낀 내 유리창이 밀리고/ 그 밀린 유리창을 조금 더 밀면 닦이지 않던 물자국이 밀리고…”(이병률의 시 ‘무늬들’ 중에서).

시인의 말대로 겨우내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닦이지 않던 물자국 같은 어룽어룽한 그리움도, 겹겹의 나이테를 드러내며 쓰러진 설해목 같은 쓰라린 사랑도, 강물 저 밑바닥에 켜켜이 쌓인 모래알 같은 미움들도 보입니다. 지문 하나 남지 않게 말갛게 닦아내면 마음까지 맑아집니다.

책상 서랍도 정리합니다. 정현종 시인의 ‘모든 것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라는 시를 적어 건네주고 떠난 직장 후배가 성격처럼 단아한 손글씨로 쓴 편지가 보입니다. 함께 일했던 수녀님이 보내온 편지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관계는 느낌으로 맺어진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말과 현란한 몸짓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 느낌이 따뜻했던 분, 동년배로서의 편안함도 있었지만, 차라리 말 없음이 친근함이었죠.” 답장 삼아 보내려다 만 이지엽 시인의 ‘해남에서 온 편지’라는 시도 있습니다.

 

“아홉배미 길 질컥질컥해서/ 오늘도 삭신 쿡쿡 쑤신다/ 아가 서울 가는 인편에 쌀 쪼깐 부친다 비민하것냐만 그래도 잘 챙겨 묵거라 아이엠에픈가 뭔가가 징허긴 징헌갑다 느그 오래비도 존화로만 기별 딸랑하고 지난 설에도 안 와부럿다 애비가 알믄 배락을 칠 것인디

그 냥반 까무잡잡하던 낯짝도 인자는 가뭇가뭇하다 나도 얼릉 따라 나서야 것는디 모진 것이 목숨이라 이도저도 못하고 안 그러냐 쑥 한 바구리 캐와 따듬다 말고 쏘주 한잔 혓다 지랄 놈의 농사는 지먼 뭣 하냐 그래도 자석들한테 팥이랑 돈부, 깨, 콩, 고추 보내는 재미였는디 너할코 종신서원이라니…

그것은 하느님하고 갤혼하는 것이라는디… 더 살기 팍팍해서 어째야 쓸란가 모르것다 너는 이 에미더러 보고 자퍼도 꾹 전디라고 했는디 달구똥마냥 니 생각 끈하다/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

 

나이를 한자로 하동(夏冬)이라 하지 않고 ‘춘추(春秋)’라고 하지요. 생명이 태어나고 스러지는 계절이 봄과 가을이라 그렇게 부르나 봅니다. 자연의 계절과 달리 인생의 계절에서는 봄이 한 번뿐인데, 인생의 봄과 여름을 지내고 이제는 가을로 접어든 듯합니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그야말로 철[春夏秋冬] 모르는 어린이가 되는 듯합니다. 손자까지 본 초등학교 여자 친구들을 만나 무람없이 주고받는 우스갯소리에 마냥 낄낄대며 즐거워하는 ‘징헌’ 나이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을 만나면서 “시절을 잃어버린 텅 빈 앨범 속에 버려두었던 나를” 발견합니다. 마음이 창밖으로 자꾸만 달아나는 봄날입니다. 빙그레 웃으며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신학교 시절의 벗 김진룡 안토니오.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평소처럼 자전거를 타다가 심장마비로 전군가도를 활주로 삼아 하늘로 떠나버린 친구 신부가 그리워지는 봄날입니다.

 

“몇몇 사랑하는 사람들은/ 세월 속에 숨었고/ 몇몇 그리운 사람들은/ 무덤 속에 숨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술래다”(장효인, 숨바꼭질).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