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84. 나의 신앙 나의 문학 50년

안영 실비아(소설가)
안영 실비아(소설가)

2015년은 나에게 특별한 해이다. 문단에 들어선 지 50년이 되었고, 무엇보다 하늘나라 시민권을 딴 지 50년이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청소년 시절 두 개의 꿈을 가졌었다. 작가 되기와 교사 되기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964년 12월에 세례성사를 받고, 이듬해 3월에 작가와 교사라는 두 가지 꿈을 동시에 이루었다. 세상 부러운 것이 없을 만큼 행복했다. 나는 이 일을 주님의 은총이라 굳게 믿고, 끝까지 효도하며 살리라 다짐했었다.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마음을 굳힌 건 대학생 때다. 그러나 6개월의 교리교육 과정이 만만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고향인 광양에서 공무원 생활을 할 때에야 뜻을 이루었다. 그때만 해도 광양은 워낙 시골이라 성당도 없고, 신자 30여 명의 작은 공소뿐이었다.

주일마다 순천본당 보좌신부님이 오셔서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해 주셨는데, 그분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멕시코 신부님이셨다. 당연히 우리말이 서툴렀기에 영어를 섞어 쓰셨다.

나는 그분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드리기도 하고, 교우들과의 사이에서 서툰 통역을 하기도 하며 즐겁게 예비신자 생활을 했다. 이따금 순천본당에 가서 정식으로 미사 전례에 참석하는 기쁨도 누리기도 했다.

드디어 천주님의 딸이 되는 날! 그날 일은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날 새벽 4시, 통금(1945년 9월부터 1982년 1월까지 시행된 야간 통행금지)이 풀리는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정성껏 묵주기도를 드리고, 전날 밤 고이 싸둔 흰옷 보자기를 점검하면서 아침을 기다렸다.

몇 년을 별러온 일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공소에 나가 미사를 드리고, 대모님과 함께 순천 저전동본당으로 떠났다. 그곳에는 마당이 그득하도록 많은 교우가 모여 있었다. 대모님의 시중을 받으며, 그곳 회장님댁에서 준비해온 흰옷을 갈아입고 150여 명 예비신자 속에 있는 내 자리에 찾아들었다.

예식은 마당에서 하는 절차와 실내에서 하는 절차로 나뉘어 있었다. 보속을 뜻한다는 자색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줄줄이 열을 지어 타원을 이루며 세 분 신부님 앞에 섰다.

경문을 외고 이마며 목이며 귓불이며 코끝에 십자성호를 새겨 받고, 모든 맛의 근원이자 방부제인 소금을 혀끝에 녹이고, 마지막으로 사도신경(당시에는 종도신경)을 외며 실내로 들어갔다.

실내에선 아일랜드 출신의 주임 신부님이 모든 걸 혼자 주관하셨다. 남녀 혼성의 성가 소리 은은한 가운데 신부님께서 우리 이마에 물을 부으며 예식을 거행하실 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여러분의 영혼을 지금 볼 수 있다면 너무 깨끗하고 맑아 눈이 부시도록 황홀할 것입니다. 이로써 여러분은 모든 원죄와 본죄를 씻고 천주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애써 눈물을 참던 나는, 신부님의 이 강론 말씀에선 더는 어쩔 수 없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바로 그때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 하얀 치맛자락에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아니, 선명한 십자가 모양이 나타나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눈물 때문에 그렇겠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그 빛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나 놀랍고 두려워 더욱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날 이후, 나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단 한 번의 권태기 없이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돌아보니 어느새 반백 년, 문학과 신앙이라는 두 버팀목이 없었다면 온갖 비바람과 눈보라를 어찌 견뎠을까. 감사하고 감사한 나의 신앙, 나의 문학….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