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고교 때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일찍 여읜 탓이었으리라. 늘 영혼이 허허로워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었다. 친구 따라 예배당에도 가보고, 원불교당에도 가보았다. 어딜 가나 좋은 말씀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때문에 안주하지 못하고 도중하차에 도중하차를 거듭하며 수년의 세월을 보냈다.
대학생 때에야 천주교에 관심을 두게 되었는데 당시 성당은 내게 두 가지 이미지로 떠오르는 곳이었다. 하나는 멀리서 보아도 우뚝 돋보이는 고딕식 첨탑,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새벽마다 들려오는 은은한 종소리! 그 이미지가 하도 경건하고 그윽해 은근히 가보고 싶은 곳이었지만 예배당이나 원불교처럼 나를 이끌어줄 친구가 없어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 옆을 지나게 되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나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섰다. 스무 살 나이는 이제 누구의 도움 없이 낯선 곳에 혼자서도 들어설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경건하고도 성스러운 기운에 둘러싸인 성당 마당을 조심스레 돌다가 한쪽에 서 있는 성모상을 보았다.
‘어머나, 아름다워라!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네’ 하고 생각하며 자석에 끌린 듯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성모상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 내리며 찬찬히 바라보았다. 마침내 나의 시선이 성모님의 발치에 꽂혔다. 긴 치맛자락 끝에 살짝 나온 맨발! 성모님의 맨발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며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얘야, 어딜 갔다가 인제 오느냐?”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밤늦게 돌아온 딸을 맨발로 뛰어 나와 반겨 주시는 어머니의 모습, 나는 갑자기 그분에게서 모성을 느꼈다. 그분이 두 팔을 벌려 나를 꼭 안아 주시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내 볼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침내 성당이야말로 나의 안주처라고 마음을 정했다. 몇 년 뒤 내 발로 성당을 찾아가 예비신자 등록을 하고 6개월의 긴 교육 끝에 ‘실비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날 성당에 들어선 것이 어찌 나 혼자의 힘이었겠는가. 하느님께서 불러 주셨고, 성모님께서 안내해 주셨던 것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비신자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나는 영세 신부님을 찾아 성모상 앞에서 관면 혼배를 받았다. 그가 하루속히 주님을 영접하고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어머니께서 전구해 주시리라고 기도하는 마음에서였다. 덕분에 결혼 7년 만에 세례를 받은 남편은 나보다 더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이 되어 성모 신심을 키웠고, 사목회원으로 갖가지 봉사 생활을 하더니, 신도시 분당에 이사 와서는 구역 형제회장을 비롯해 연령회장으로 봉사하다가 아름답게 귀향했다. 내 결혼 생활 중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다.
나는 이사할 때마다 맨 먼저 하는 일이 있다. 십자고상과 성모상을 깨끗한 보자기에 싸서 고이 지켰다가, 새집에 가면 현관에서 딱 보이는 거실 벽 쪽에 맨 먼저 그분들의 거처를 마련해 드리는 일이다. 두 분이 그 자리에 계시지 않으면 나의 효도에 흠집이 나는 것만 같아서다.
그러고는 밖에 나갈 때마다 현관에 서서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외출했다 돌아오면 “잘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린다. 특히 귀가 때에는 밖에서 있었던 기쁜 일과 슬픈 일, 때로 기분 나쁘고 속상했던 일도 다 아뢴다. 그러고 나면 어머니께서는 내 마음에 넘치도록 평화를 담아 주신다.
나는 요즘도 성모상 앞에 서면 성모님의 맨발에 시선을 꽂고 스무 살 때의 감동을 되살리곤 한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