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9. 내 인생의 개선안

신달자 엘리사벳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신달자 엘리사벳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지난주 미사 때 신부님이 강론에서 “‘삼척’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사람들이 모두 “강원도요” 하고 착하게 대답했다. 신부님은 삼척은 우리 마음에 있다고 하시면서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이 삼척이라고 해서 모두 웃었다.

어쩌면 나도 이 삼척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 내 인생이 어지러워졌는지 모른다. 그나마 그래도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날마다 내 인생의 개선안을 마음으로 정리해보면서 오늘 하루를 무엇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기는 한다. 글은 좀 더 잘 쓸 수 없는지, 강의는 좀 더 잘 할 수 없는지, 사람을 만나는 태도는 좀 더 좋아질 수는 없는지, 기도는 좀 더 진지할 수는 없는지를 생각하면서 좀 더 깊이를, 넓이를, 따뜻함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어쩌다가는 스스로 나 자신이 유약하고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빈둥거리고 모든 것을 귀찮아하기도 하는 것이다. 거기다가 지나온 세월들은 하나같이 후회스러운 것이 많고 제대로 해온 것도 없고 부끄럽고 해서 나이를 들먹이지 않고 야무지게 꿈을 가지고 개척해 나가려고 굳게 마음은 먹는다. 그런 순간에 나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의 한 부분을 읊어본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가을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여름의 천둥도 가을 국화를 피우는 일이고, 무서리가 내리고 시인에게 잠이 오지 않는 것도 모두 가을에 국화가 피려는 조짐이었다고 말하는 이 시인의 말이 옳다면 아니 국화 그 하찮은 꽃 하나가 피려고 천체가 움직이고 사계절이 움직인다면, 그렇다면 우리 못난 인간 하나가 태어날 때도 아마도 무슨 근사한 조짐이 있었을 것 아닌가. 그 생각을 하면 내 생명 하나도 무릇 소중하고 장하다는 생각을 한다.

국화야말로 장미처럼 고혹적이지도 않고 목련이나 모란처럼 귀족적인 꽃은 더욱 아니니 그저 그런 꽃 하나가 피는 것도 이렇게 요란스러웠다면, 아니 그런 꽃 하나가 피려고 한 시인의 상상력과 은유가 이렇게 감동적이라면 우리 자신이 태어날 때는, 아니 우리 생명 하나는 엄청나게 귀한 존재들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모두 그립고 아쉬움이 많은 젊은 날을 보냈다. 아니 젊은 날이란 그런 것 아닌가 후회스럽고 아쉽기만 한 젊은 날을, 그 먼먼 젊은 날의 뒤안길을 돌아 거울 앞에 선 누님같은 꽃이야말로 스스럼없고 마음 편안한 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가장 마음의 밑줄을 긋게 되는 곳이 ‘이제는’이라는 형용사다. 나는 이 시를 낭송할 때 언제나 ‘이제는’이라는 말에 힘을 준다. 어느 아침인들, 어느 저녁인들 우리가 이 말에 힘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선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면서 벌떡 일어서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가을 국화를 바라보는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요즘 신중년이란 말이 힘을 받지만 젊음을 그냥 아쉽게 흘러보냈다면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각자 선 그 자리에서 조건을 따지지 말고 ‘이제는’이라는 시 구절을 힘내어 소리내 보면서 자신의 희망에 새싹이 나올 수 있도록 자기가 자기를 일으켜 세우는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게 또 하나의 추수이며 기도가 아니겠는가.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