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피정) 구원에 이르는 고통 – 장재명 신부

 

SALVIFICI DOLORIS
구원에 이르는 고통

인간 고통의 그리스도교적 의미에 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에 반포한 사도직 서한이다.

교황께서는 고통에 관한 깊은 묵상을 통해
우리의 생활을 반성하고 승화시킬 것을 요구하시며
성서 말씀을 들어 길을 제시해주신다.

“고통은 구원의 기쁨을 얻기 위한 가장 좋은 도구이다.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찾게 하고 

고통받고 있는 이들과  일치하는 것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가장 좋은 길임을 가르쳐준다.”

(한국어로는 1995년에 출간되었으나, 현재 절판됨.
그러나, 이 글의 끝부분에
오마리아글라라 수녀가 읽어주신 영상이 있음)

 

좋은 피정 지도를 해 주신 장재명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강의 녹음 1 (53:07)

Christianus cogitans M464 – 구원에 이르는 고통 I – YouTube

 

2. 고통은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이야말로 그 나름대로 인간에게 고유한 깊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또 특별히 그것을 능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인간의 초월성에 속해 있다고 하겠습니다. 곧 인간이란 어떤 의미에서 인간 자신을 넘어서 나아가도록 운명 지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 초월성을 향하여 부름받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고통입니다.

 

7. 그리스도교는 근본적으로 존재는 선이며 존재하는 것은 선하다고 선포합니다. 창조주의 선하심을 인정하며 피조물의 선함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것은 악이 선의 어떤 결핍이나 제한 또는 왜곡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가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에게 단절되어 있는 또는 자기가 박탈당하게 된 그런 선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사물의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그러한 선에 마땅히 참여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인간은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11. 욥의 고통은 결백한 사람의 고통입니다. 그것은 신비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것을 한 개인의 지능만으로 완전히 꿰뚫어 볼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과오와 연결되어 있을 때에는 벌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모든 고통이 잘못의 결과이며 벌의 성격이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욥이라는 의인상은 구약성경에서 이를 입증하고 있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계시는 한 결백한 인간의 고통 곧 죄 없이 겪는 고통이라는 문제를 지극히 솔직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욥은 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욥이 무참한 시련에 짓눌린 것은 사실이지만 욥에게 벌이 내려질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상 출처 강사제공: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amotedomine&logNo=223702842499&navType=by


강의 녹음 2

Christianus cogitans M465 – 구원에 이르는 고통 II

 

12. 고통은 인간 안에서 회개 곧 선의 재건에 기여해야 하며 인간은 이 회개하라는 부르심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참회의 목적은 인간 안에 온갖 형태로 숨어 있는 악을 극복하는데 있습니다. 그 목적은 또한 인간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와 특히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에서나 선을 강화하는데 있습니다.

 

13. 고통의 “왜”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궁극 원천인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계시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은 또한 언제나 하나의 신비로 머물러 있기 마련인 고통의 의미가 흘러나오는 가장 풍부한 원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숭고한 사랑을 터득할 수 있는 만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신비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의 “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또한 고통의 의미 문제에 대한 해답의 가장 충만한 원천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 해답을 주신 것입니다.

 

14.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니코데모와의 대화 중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핵심으로 우리를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교의 구원론 곧 구원 신학의 본질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원은 악에서 해방됨을 의미하며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고통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니코데모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을 악에서 해방시키려고 하느님께서 세상에 당신 아들을 주시는데 바로 그 안에 고통에 관한 결정적이며 절대적인 전망이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주신다”는 말씀 자체가 이 해방은 외아들 그분을 통하여 그분 자신의 고통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서는 사랑이 표명되고 있는데 그것은 외아들 그분의 무한한 사랑이며 이 때문에 당신 아들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위한 사랑, 세상을 위한 사랑입니다. 곧 구원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니코데모와의 대화는 고통의 근본적이며 결정적인 의미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멸망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 주셨는데 ‘멸망하지 않게’ 라는 이 말씀은 바로 그 다음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라는 말씀으로 구체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잃을 때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립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단순히 현세적인 고통이 아니라 결정적인 고통 곧 영원한 생명의 상실이고 하느님께 배척당하는 것이며 영원한 벌인 것입니다.

(이상 출처 강사제공: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amotedomine&logNo=223702861415&navType=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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